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을 걸으며. (Walking the Camino del Norte)
작년에 다녀왔던 산티아고 북쪽 길 추억을 블로그에 가볍게 적었다.
겨우 삼 주 정도 되는 추억을 풀어 놓는데 삼백일이 걸렸다.
시간이 없었다.
놀고먹고 쓰러져서 누운 채로 오전과 오후를 보내고 저녁때쯤 기어 나와 허기진 배를 달래느라.
일 끝나고 집에 오면 방전된 배터리처럼 모든 에너지가 떨어져서 멍하니 고개를 까닥대다가 정신을 잃고 다음 날 아침까지 자느라.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언제 삼백일이 넘는 시간을 흘려보낸 건지. 그 많은 시간은 다 어떻게 흘러가는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날짜가 흘렀다.
저곳.
까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 길에서는 하루가 길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가는 긴장감과 발에 물집이 잡히고 어깨가 짐에 짓눌리는 아픔 덕분이다.
삼백일 일상에선 만나기 어려운 경험을 많이 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 에너지를 받았고, 불쾌한 사람을 마주쳐서 지금껏 받은 에너지를 다 날려버리기도 했다.
먹고, 자고, 노는 것 이외는 다른 데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동물들을 보았고,
먹고, 자고, 놀기 위해서 인생 하루하루를 고군분투하는 인간 군상도 마주했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을 바람막이 촛대에 넣고 꺼지기만 기다리기보다는,
촛불을 들고 들판으로 달려가 불을 질러 버리는 건 어떨까?
그렇다면 그 들판은 어디일까?
산탄데르.
현금이 떨어져 가까운 ATM을 찾았을 때 보았던 빨간 로고.
새빨간 바탕에 S어쩌구der라고 쓰여있는 걸 보고는 살라만더라고 잘못 읽었던 기억.
카드를 넣고 돈을 안 내놓으면 어쩌나, 카드도 안 내놓으면 어쩌나 했던 걱정과는 달리 돈도 카드도 공손하게 내뱉었던 산탄데르 은행의 ATM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다.
그때만 해도 산탄데르에 직접 오게 될 줄 몰랐다.
꼭 오고 싶었던 도시도 아니고 그저 한참 걷다 멈추기 적당한 위치였으며 공항에서 원하는 곳까지 비행기가 다닌다는 단순한 이유로 산탄데르에 묵게 되었다.
도착한 첫날 여행자 안내소에 가서 듣기로는 현대 미술관도 있고 막달레나 궁전이나 MMC가 참 가볼 만 하다고 했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해산물은 꼭 먹어야 한다며 도심에서 한참 떨어져 보이는 곳에 동그라미를 여러 번 치며 거듭 강조했다.
우선 해양박물관(MMC, Museo Marítimo del Cantábrico).
상당히 볼거리가 많다.
대항해시대라는 게임을 좀 해봤다면 갤리온을 한 척이라도 얻길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이 박물관엔 그런 배가 옛날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조선 공정을 모형으로 만들어 두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물놀이 가서는 보기 어려운 수많은 해양 생물 표본이 마련되어 있으며,
지하에는 멋진 아쿠아리움도 있으니 둘러보는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다.
막달레나 궁전(Palacio de la Magdalena)은 정원을 참 잘 꾸며놨다.
내부는 가이드 투어로만 볼 수 있는데 인원도 한정적이며 내가 갔을 땐 스페인어로만 설명해주어서 알아듣기도 어렵고 지루했다.
방이랑 홀이랑 한번 쓱 둘러보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뭔 옷장 하나에도 그렇게 사연이 많은지.
아무튼, 정원은 참 잘 꾸며놨다.
찬찬히 걸으며 여유를 만끽하기 좋은 곳이다.
막달레나궁부터 해양박물관을 거쳐 시내 중심가까지 경관을 감상하며 걸으면 좋다.
단, 날씨가 좋다면!
날씨가 굳을 땐 참 을씨년스럽다.
길을 따라 쭉 걸으면 시내 중심가에 물놀이를 즐기는 소년들 동상(Los raqueros)이 있다.
나는 운이 좋아서인지 동상처럼 낚시하는 사람도 같이 보았다.
주변이 탁 트여서 사진찍기 좋은 곳이다.
현대미술관은 볼거리가 별로 없다.
동네 주민들이 십시일반 잡동사니를 한둘씩 기부해서 만든 만물상 느낌이다.
자 이제 볼거리는 대충 다 보았으니 먹으러 가보자.
여행자 안내소에서 동그라미 백만 번 치며 강조했던 해산물 식당.
과연 그럴 만 하다. 특히 랍스타!
지도에 표시된 이 지역에 해산물 식당이 몰려있다.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 식당에서 먹었다.
술 한잔하면서 가벼운 음식을 먹고 싶다면 까사 리타(Casa lita)라는 핀쵸바가 참 좋다.
저 옆을 지날 때면 둘러서 술 한잔, 핀쵸 한 두개를 뚝딱 해치우고서야 발걸음이 떨어졌다.
다 좋지만, 산탄데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식당을 꼽으라면 Al Punto다.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열어 따듯한 아침을 제공해 주었고,
직원들은 친절했으며 맛도 상당히 괜찮았다.
커피를 곁들인 토르티야를 2.2유로에!
아주 좋다.
특히 맛있었던 건 Rabas다.
Calamares가 아니라 Rabas라고 쓰여있어 뭔가 했는데, 오징어 튀김이다.
오징어 튀김이 뭐 별건가?
근데 머릿속에서 자꾸 오징어가 돌아다닌다.
아! 거기 오징어 튀김 정말 맛있었는데.
아~ 산탄데르 랍스터도 맛있었지만, 오징어 튀김 정말 맛있었는데….
자꾸만 떠오른다.
어쩌면 예전 어벤져스 촬영팀이 한국에 왔을때 김밥을 먹으면서 이런 감탄사를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오! 참치마요 김밥. 입에서 살살 녹는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다니?!'
게다가 이게 겨우 2달러? 말도 안돼!'
내가 라바스를 자꾸 떠올리는 것도 그런 류의 충격 때문일지 모르지만, 우연히 이곳에 들른다면 꼭 먹어보자.
난 다음에 가면 두 개 시켜서 혼자 다 먹을 생각이다.
이 식당이 원래는 현대미술관 근처에 있었지만, 구글 지도에 물어보니 지금은 이사를 했다고 나온다.
엘 세르발은 산탄데르에서 알려진 맛집 중 하나로, 미슐랭 가이드 2017에서 별 하나를 받았다.
사실 딱히 미슐랭 가이드에 나와서 찾아갔다기보다는, 숙소 가까이에 괜찮은 식당이 있나 찾다가 얻어걸렸다.
식당을 향하는 내내 혹시 잘못 들었나 생각될 정도로 예상하기 힘든 곳에 있다.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다면 절대 찾지 못할 곳에 숨은 맛집.
엘 세르발.
엘 세르발이란 이름을 번역기에 돌렸더니 북유럽에서 '생명의 나무'로 신성시되는 마가목이란다.
아마도 유리창에 그려져 있는 나무가 엘 세르발이 아닐까?
자리에 앉으면 빵을 가득 싣고 와서는 묻는다.
"어떤 빵을 드릴까요?"
빵을 고르면 즉석에서 썰어 주고, 여러 종류 올리브유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선택해 빵을 찍어 먹는다.
빵을 좋아하는 나는 처음부터 만족스러웠다.
이어져 나오는 요리들은 '과연, 미슐랭 별을 받은 맛집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장식이 화려하진 않아도 눈이 즐겁고, 식욕을 돋우기에 충분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커피를 주문하면 맛 좋은 초콜릿도 선물로 준다!
세상에.
빵이랑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두 배의 만족을 얻어 가리라.
엘 세르발.
미슐랭 가이드에 나온 칸타브리아의 맛집은 날 실망케 하지 않았다.
긴 도보 여행을 마치고, 위 칸과 아랫 칸의 삐걱대는 침대 소리가 없는 조용한 독실.
숙소 이름이 거창하게 그란 호텔 빅토리아가 아니어도, 작은 민박집이었더라도 기분이 좋았을 거다.
그래도 거창한 이름 덕분인지 직원들이 친절했고, 방도 깨끗한 편이었다.
아침밥 나쁘지 않고, 저녁도 한 번 먹어봤는데 썩 괜찮은 편이다.
여행에서 특별히 좋은 경험을 선사한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처참한 상처를 남기지도 않았다.
그란 호텔 빅토리아에 체크인하는 날.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하러 밖에 나가려는데, 하늘에 구멍이 났는지 비가 억수로 온다.
우비를 입고 나가면 우비째 바다로 떠내려갈 것 같은 폭우가 눈앞에 쏟아졌고,
뱃속에서는 천둥 번개처럼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비 오는 날이 참 좋다.
밖에 나갈 일만 없다면.
그래서 이 좋은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호텔에서 저녁을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진 않을지라도, 폭우에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목이 꺾이는 것보다야 무엇이라도 좋았다.
이런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먹은 밥이라 더 그랬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괜찮았다.
그란 호텔 빅토리아.
이 숙소에서 며칠을 묵기로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다가 가깝다는 것이다.
숙소에 작은 발코니가 있고, 바다가 시원하게 보인다.
가볍게 슬리퍼만 신고 나가 바다에 뛰어들어 신나게 놀고 나서는 숙소에 돌아와 씻으면 된다.
물놀이하기 좋은 곳이다.
다만 '바다에 가볼까?' 마음만 먹었다 하면 비가 쏟아져 내려서, 지리적 이점을 누리지 못했기에 아쉬웠다.
그란 호텔 빅토리아.
산탄데르 시내 중심에선 멀지만, 버스정류장은 가까우니 중심가를 오가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다.
이곳은 누구든 쉽게 잊어 버릴만큼 별 특색이 없으나, 내게는 신뢰 있는 호텔로 기억된다.
그 이유는 보름 전에 택배로 보냈던 물건을 오랫동안 잘 보관해 줬기 때문이다.
부슬비가 내리는 저녁 골목을 지나다가 느낌이 좋은 식당을 발견했다.
밥을 먹기엔 늦은 시간이라 이틀 뒤 저녁 시간으로 예약해 두었다.
이틀은 금방 지나갔고, 기대에 찬 발걸음으로 자카란다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하기 쉬운데 자카란다 식당은 큰 만족을 주었다.
일단 분위기가 좋고, 친절했으며, 음식 맛도 보통 이상이었다.
마드리드에서 살다 오신 주인아저씨는 동네 사람 대하듯 편안히 대해주시고,
음식이 나올 때마다 친절히 설명도 잊지 않으셨다.
끝이 좋아야 좋은 기억을 남기는 법인데,
디저트는 미각에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곳 음식이 맛있다고 기억하는 데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나온 올리브가 큰 영향을 끼쳤다.
좋은 올리브로 집에서 만든 올리브 절임.
지금껏 먹어본 올리브 중 제일 맛있었다.
산탄데르 자카란다 레스토랑.
분위기, 친절, 맛 삼박자를 고루 갖춘 좋은 식당이다.
산티야나 델 마르.
이런 생소한 곳에 올 계획은 없었다.
오랜만에 도시에 도착했으니, 쇼핑도 좀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도시 문화를 만끽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도시에 문을 여는 가게가 한 곳도 없는 게 아닌가?
이날은 동네 사람들이 기다려 마지않는 휴일이었던 것이다.
날씨도 축축하고.
숙소에서 인터넷 서핑이나 하고 하루를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지만,
산티야나 델 마르 소개서를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알타미라 박물관'
하루에 몇 대 없는 버스 중 한대는 이미 놓쳤고, 다음 버스를 타고 오후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에 우선 식당에 들어가 배를 채웠다.
분위기에 비해 맛은 그저 그랬다.
특히 아스파라거스는 기대했던 모양새가 아니라, 촛농 범벅이 된 양초 같은게 나와서 당황했다.
뭐 그래도 비를 피했음에 만족하고 산티야나 델 마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아기자기한 동네라 금방 돌아본다.
기념품가게도 들어가보고, 꽃을 사랑하는 집 구경도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먼 걸음을 한 건 알타미라 박물관이 궁금해서다.
여행자 안내소에서는 분명 알타미라까지 가는 버스가 하루에 몇 대 있긴 하다는데, 확실하진 않단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가 올 때마다 알타미라 박물관에 가느냐 물어보다 지칠 때쯤 세인트 버스기사 아저씨께서 말씀하셨다.
"이 버스는 알티미라 박물관을 향하노라!"
알타미라 박물관은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올 만 한 곳이었다.
옛사람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영상물도 재미있었고, 실제로 동굴벽화를 그리기를 체험하는 곳도 있었다.
알타미라 박물관인 만큼, 알타미라 동굴을 그대로 재현해 둔 Neocueva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교과서에서 봤던 그림에서는 느끼지 못한 감동이 있었다.
동굴 벽면의 굴곡과 음영을 이용해서 동물을 입체감 있게 그려냈고,
단순히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불고 문지르며 작품을 완성해냈다.
멋지다.
전시는 정말 잘 보았는데, 마을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
마을로 돌아가는 버스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걷기로 한다.
밖에 내리는 폭우는 언젠가 그칠 테니까.
여행자 안내소에서 걸어가기는 힘든 거리라고 했지만,
수백km를 걸어왔는데 이 정도가 대수랴.
마을로 내려와 산티야나 델 마르에서 유명한 카스테라(Sobaos pasiegos)를 하나 주워 먹었다.
뻑뻑하게 생겼는데, 보기보다 맛이 좋다.
그래서 이 동네 사람들이 다 이 빵 봉지를 들고 다니나 보다.
볼 건 다 봤으니 산탄데르로 돌아가야 하는데,
시간표보다 한 시간을 더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둘씩 늘어나고,
서로 얼굴을 보곤 안심한다.
'설마 사람이 이렇게 기다리는데 버스가 안 오겠어?'
한 아저씨는 마음이 급한지 지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어본다.
"오늘 아직 버스 있어요? 있죠?"
까닭은 모르겠으나, 그 아저씨 덕에 버스가 있으리라는 믿음이 더해졌다.
드디어 버스가 온다.
사람들이 달려나가고, 기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 버스가 아닌가 보다.
또 그 아저씨가 버스 기사에게 묻는다.
"우리가 탈 버스는 언제 옵니까?"
"금방 오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십 분 정도 더 기다리자 버스가 도착했다.
산티야나 델 마르.
버스 기다림의 마을.
혹 나중에 또 산티야나 델 마르가 가고 싶다면, 산탄데르에서 미리 투어로 신청해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