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 포함.'
"아침은 언제 먹을 수 있나요?"
"자정이 넘어서부턴 언제 드셔도 괜찮습니다."
이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식탁에 놓인 조그만 접시.
그 위에는 슈퍼에서 파는 말라붙은 빵 쪼가리.
비스킷 하나.
티백 하나.
'이게 뭐야!!'
이런 음식으로는 식사하며 사용되는 에너지도 보충해주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살면서 식사라고 내준 것 중에 가장 형편없었다.
어릴 적 학교 급식에 햄 스테이크라고 적힌 메뉴가 생각났다.
그건 김밥용 햄을 조금 크게 썰어주는 거였다.
그건 이 '조식 포함'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우비라고 파는 걸 사서 입었지만, 빗물을 하나도 막아주지 못할 때 이런 기분이 들까?
세상을 살다 보면 간혹 속을 때도 있다.
이건 그저 한 끼의 아침 식사일 뿐이지만,
배신당한 믿음엔 항상 슬픔이 뒤따른다.
그 슬픔은 때론 분노로 바뀌기도 하고,
더 큰 슬픔이나 무기력으로 빠지기도 한다.
나의 슬픔은 잠시 분노로 변했으나, 화낸다고 상황이 나아질 건 아니니까 체념하고 짐을 싸 나왔다.
산토냐에서 노하는 가까운 거리다.
그래서 부씨엘로라는 산을 들렀다.
꽤 산 같은 느낌이 난다.
여기저기 울어대는 산 곤충도 많고 경사도 제법이다.
산 위에 오르면 바다가 잘 보일 줄 알았는데, 울창한 나무에 가려 바다는 잘 보이지 않았다.
산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올 즈음, 아래쪽에 넓게 쳐진 담장이 보인다.
무슨 건물인가 궁금해서 자세히 보았더니 교도소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높게 쳐진 벽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교도소 생활을 이토록 가까이서 본 적은 처음이다.
그리고 그 교도소 옆엔 묘지가 있다.
묘지와 교도소 사이.
삶의 경계를 걷는 기분이 묘했다.
나는 오늘도.
낮과 밤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그리고 삶과 죽음 그 어디쯤을 걷는다.
노하에는 2시가 안 되어 도착해서 숙소에 짐만 풀어 놓고 해변에 일광욕하러 나섰다.
오렌지 한 망과 바나나, 산미겔 맥주까지 싸 들고 어딘가 즐거운 곳으로 휴가를 떠나는 기분이다.
산미겔을 사게 된 건 길을 걷다가 바닥에 떨어진 산미겔 맥주캔을 많이 보아서다.
길바닥 마케팅이랄까.
뜨거운 태양과 모래사장.
그 아래서 즐기는 시원한 맥주.
캬~
생각만 해도 좋다.
그런데 맥주가 정말 맛없다.
이런 분위기면 대충 아무거나 마셔도 맛있을 텐데 이런 맛이라니.
아쉽다.
물놀이하려고 바다에 발을 담갔더니 물이 아주 차다.
잠깐만 놀고 나와서 기분 좋은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고 해변을 바라보니 엄청난 몸짱 할아버지가 물놀이를 즐기신다.
지방은 없고 뼈와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산 세바스티안 해변의 몸 좋은 젊은이들도 이 할아버지를 보면 고개를 절로 숙였으리라.
미켈란젤로가 저 인체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면 다비드상 대신 안토니오 석상을 조각하지 않았을까?!
다비드는 어렸다.
숙소로 돌아와 소금기를 씻어내고, 노하 시내 구경을 잠깐 하고 돌아와선 숙소 1층 식당에서 순례자 메뉴를 먹었다.
아로즈, 마카로니, 레드와인, 생선, 소고기, 요거트, 수박.
다양한 요리가 나왔으나, 생선 빼고 나머지는 그냥 그랬다.
음식 복은 없는 날이다.
그래도 숙소는 좋았다.
숙소는 방이 3개였는데 사람이 많지 않아 방 하나를 통째로 썼으니까.
리엔도에서 라레도까지 가는 길이 참 예뻤다.
바다와 언덕이 잘 어우러졌고, 특히 구름이 아름다웠다.
구름은 하늘을 캔버스 삼아 마음껏 그림을 그렸다.
라레도 가는 길에 만난 언덕은 길이 좋아 다리가 저절로 걸음을 옮겼다.
라레도 마을이 멀리서 보일 때는 참 아기자기하고 작은 도시처럼 보였지만 막상 도시에 가까워져 오니 꽤 규모가 있다.
일요일이었는데도 아침부터 부지런히 문을 연 구멍가게에 들렀다.
이름 없는 작은 가게라 가격이 비쌀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바나나 4개들이 한 송이와 물 1.5ℓ를 1.35유로면 사니까.
라레도 선착장에는 산토냐행 배편이 있다.
바다가 보이기에 다 온 줄로만 알았는데, 선착장까지는 4km도 더 가야 했다.
막상 선착장이라 불리는 곳에 도착했으나 그냥 모래사장이고 배 시간 안내나 배 타는 곳을 안내한 표지판도 보이지 않는다.
'헤엄을 쳐서라도 건너가야 하나?'
트레토 강(Ría de Treto) 건너로 산토냐가 보인다.
뗏목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우선 모랫바닥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 저편으로 건네주는 배는 보이질 않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50대 초반의 독일인 커플이 배낭을 메고 이쪽으로 걸어온다.
"여기서 배를 타는 겁니까?!"
"글쎄요. 여기 어디쯤인데 배가 보이질 않네요!"
아저씨는 전에 포르투갈 길을 걸었다는데 참 아름다웠다고 했다.
나도 나중에 한 번 걸어보겠노라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 멀리서 배 한 척이 다가온다.
다행이다.
매일 시간 맞춰 다니는 지하철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1인당 2유로를 내고 산토냐로 향한다.
산토냐 선착장에 내려 독일인 커플과 작별하고 바에 들러 또르티야와 커피 한잔을 마신다.
든든하다.
우선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산토냐 시내 구경을 나섰다.
동네 곳곳에 피어나는 생선 썩은 냄새가 작은 어촌마을에 여행 온 기분을 더해준다.
투우 경기장을 구경하고, 바닷가를 따라 걷는다.
곳곳에 돌로 된 의자가 놓여있는데, 아주 편안하다.
누워서 햇볕을 쬐고 있노라면, 세상 근심 다 잊힐 듯 하다.
혹시 나중에 집을 지으면 이런 돌의자를 꼭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동네엔 어떤 맛집이 있을까?
중심가엔 식당이 즐비하다.
여행객들이 많이 보이는데 딱히 마음이 끌리는 곳은 없었다.
중심가를 뱅뱅 돌다가 원심력에 따라 조금씩 중심에서 멀어져갔다.
이젠 식당도 카페도 잘 보이지 않고, 다시 중심가로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간판 하나가 눈에 띈다. 까사 레온(Casa León)
12유로짜리 오늘의 메뉴를 먹었다.
우선 해물 빠에야와 소고기 가지 애호박 볶음 파스타를 주문했다.
상당히 만족스럽다.
두번째 메뉴로는 피망 소고기 요리(pimientos rellenos de carne)와 토마토소스 대구 요리를 주문했다.
대구는 무난했고, 피망 소고기는 정말 맛있었다.
다진 고기를 피망에 넣고 그 위에 모차렐라 치즈를 덮었는데, 세상에!
그 식감이며 맛이 정말 좋다.
후식으로 샷을 후식으로 위스키 같은 샷을 마실수 있다.
까사 레온은 특이하게도 후식으로 위스키 같은 샷을 마실 수 있다.
점원이 추천해 주는 프랑스 리큐르를 마셨는데 꼭 베일리스 비슷했다.
정말 만족스럽다.
식당에서 중심가로 나와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으며 해변을 좀 더 걸었다.
해변을 따라 잡화상들이 천막을 치고 장사 중이었는데 머리를 따주는 곳도 있었다.
머리가 좀 더 길었다면 한번 시도해 봤을 텐데 머리가 너무 짧아 아쉬웠다.
이 동네엔 보니또가 특산물이라며 집집이 파는데,
그게 뭘까 참 궁금했다.
보니또라니.
'뭐가 그리 예쁘고, 아름다운가?!'
알고 보니 그건 참치를 말하는 거였다.
산토냐에서의 하루는 참 참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