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콘차 해변이 보이는 바에 앉아 토르티야(오믈렛)와 카페 콘 레체로 하루를 시작한다.
어쩌면 지금 이 자리가 가장 아름다운 자리일지도 모르겠으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걸음을 내디딘다.
앞에 무엇이 있을지는 불확실해도 그게 무엇이든 이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줄 테니까.
힘든 도보 여행길에 목이라도 축이고 쉬다 가라며 이런 자리를 마련해 둔 고마운 분도 있다.
이미 이 길을 걸어보았던 누군가가 목말라 힘들었던 기억을 되살리며 이곳에 오아시스를 만들어 둔 것이 아닐까?
매일 보던 하얀 스크린과 회색 빌딩들 대신, 푸른 바다와 녹색 풀 내음이 가는 여행자를 반긴다.
'그 무거운 짐을 메고 어디까지 가는 거야?'
오리오에 도착하니 고양이가 호기심 어린 눈길을 건넨다.
숙소에 들어가기에는 모호한 시간이라 밥을 먹고 좀 더 걸어보기로 한다.
강가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이 참 보기 좋다.
지금 내가 사는 곳엔 물장구를 치고 놀 곳이 수영장밖에 없다.
양식장 같은 수영장과 저렇게 넓은 강에서 하는 물놀이는 그 맛이 다르다.
원래 묵으려고 했던 숙소가 문을 닫아서 다음 마을까지 걸었다.
멀리 보이는 사라우츠.
아름답지만 신기루처럼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은 도시.
사라우츠에서 어렵사리 찾은 알베르게는 문을 닫았다.
휴가로 한창 붐빌 때라 그런지 호텔을 구하기도 마땅치 않다.
"방이 없어요."
"꽉 찼습니다."
어깨는 점점 무거워지고 발걸음은 느려진다.
"남은 방이 없지만 제가 다른 숙소를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한 친절한 호텔 직원 덕에 겨우 방을 구했다.
열악한 시설에 가격도 비싸지만, 몸을 누일 곳을 찾았기에 안심이다.
짐을 풀고 씻으니 밤 열한시.
이제 슬슬 자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중에 잠들어버렸다.
산 세바스티안.
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 길을 걷기로 결정하고 가장 기대되었던 도시다.
지난 여름 이곳에서 보냈던 추억이 이번 여행의 기대감을 빵처럼 부풀렸다.
이곳에 다시 오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지난 여행 때는 오르지 않았던 우르굴 산을 아침 산책 삼아 올랐다.
이때는 요트 축제가 있는 기간이라 산 세바스티안에 사람이 아주 많았다.
사람들이 우르굴 산에 올라 팀 응원복을 입고 요트 경기를 응원했다.
다시 찾은 네스토르 바
여기 고기를 다시 맛보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했던가?!
그러나 그때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주던 직원도 없었고,
요트 축제로 사람이 워낙 붐벼서인지 고기도 대충 구워 나왔다.
겉은 심하게 탔고, 속은 하나도 안 익었다.
고기 품질도 전만 못하다.
게다가 고기를 먹는 내내 바로 옆에서 쪼그려 앉은 사람들이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네스토르 바가 산 세바스티안이라는 도시 추억의 반을 차지했는데, 이제는 여기 네스토르 바 때문에 산 세바스티안을 오지는 않을 것 같다.
산 세바스티안에 온다면 이 동네 축제 기간을 꼭 피해서 와야지.
어쩜 그때는 고기 맛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밤중에 돌아다닌 핀초(Pintxos) 투어는 좋았다.
특별히 바를 정해서 간 건 아니고, 골목마다 한 집씩 아무 곳이나 들어갔는데 다 맛있었다.
문어는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이었고, 염소 치즈(Queso de cabra)의 풍성한 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Gelateria Boulevard
이번 산 세바스티안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먹거리를 말하라면 이 아이스크림 집이다.
그냥 길거리 아이스크림 가게이고, 이 동네는 이 아이스크림 집이 아주 많다.
'뭐 그저 그런 아이스크림이겠지 그래도 더우니까 한 입 먹자.'
한 입 먹었는데, 입맛에 딱 맞는 아이스크림이다.
다른 맛 아이스크림은 그냥 그런데,
레몬과 코코넛 아이스크림은 정말 맛있었다.
단지 내가 원래 좋아하는 레몬 맛과 코코넛 맛에 다른 잡맛이 안 섞여서 그런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하루 두 번씩 꼬박 먹었다.
한 번에 세 가지 맛을 먹었는데, 다른 맛은 다 그냥 그런 아이스크림 맛이었다.
그래서 결국 리몬, 코코 + 아무거나로 메뉴가 굳혀졌다.
다음에 또 산 세바스티안에 가면 이 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다.
산 세바스티안은 해변도 참 좋은데, 이번에는 일광욕만 좀 하고 물에 들어가진 않았다.
산 세바스티안.
작은 동네인데 놀 거리도 많고, 맛집도 많다.
짧은 동선으로 많은 걸 즐기기 좋은 도시다.
지난번 산 세바스티안 여행 때 숙소는 중심에서 좀 떨어진 실켄 아마라 플라자 호텔이었다.
시설은 좋았지만, 중심가와 거리가 걷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거리여서 이번에는 구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펜션 압 도미니를 숙소로 정했다.
구시가지 산 후안 거리에 있어서 밤에 핀초 바 투어를 다니기 좋은 위치다.
방은 깨끗하고, 화장실은 공용으로 사용했는데 공용 화장실을 쓰는 손님이 적어서, 사용에 무리 없었다.
방에는 웰컴 까바와 주전부리도 놓여있어서 환대받는 기분을 느꼈다.
작은 테라스도 있어서 해가 쨍할 때 테라스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까바 한잔하는 즐거움이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직원이 자리를 자주 비운다는 점이다.
체크인하려고 초인종을 몇 번 눌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전화하고 15분 이상 기다렸다.
체크아웃할 때는 실수로 카메라를 두고 나왔는데, 직원이 없어서 다시 숙소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숙소 옆 방 아저씨가 아침 운동을 나오다가 문을 열어주셔서 짐을 챙겨 나왔다.
펜션 압 도미니 산 세바스티안.
그래도 접근성 하나는 끝내주게 좋고 시설도 만족스럽다.
지난 여름 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을 조금 걸었다.
오랜만에 도보여행이라 몸은 힘들었지만 기억에 많이 남는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을 걷는 첫 날.
파리에서 밤 기차를 타고 아침에 이룬에 도착했다.
온종일 걸어야 하니 기차역 근처 빵집에서 가볍게 아침을 먹고 걸음을 떼었다.
이룬 순례자 숙소에서 순례자 여권(Credential - 크레덴시알)을 받아 가려고 했으나, 오후 4시부터 문을 여는 관계로 일단 출발했다.
날씨도 좋고 경치도 좋다.
여행을 참 잘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걷는데 앞에 소가 한마리 보였다.
이 녀석은 좁은 길에서 통행료를 받으려는 듯 길을 딱 막고 서서 풍경을 감상한다.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더니 씩씩거리며 뿔로 들이받으려고 한다.
잘못해서 소뿔에 치이기라도 하면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끝내게 된다.
재수가 없다면 이번 여행뿐 아니라 이번 생도 같이 마감이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심스레 소 눈을 바라보며 빠르게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이 길을 지나는 동안 소를 여러 마리 만났지만 다른 소들은 그리 공격적이지 않았다.
바스크 지방에는 바스크 깃발이 자주 보인다.
애향심이 강한가 보다.
하긴 스페인에서 독립하려고 무장 투쟁을 했던 지방이니 그럴만도 하다.
파사이 도니바네.
작고 한적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 알베르게에서 크레덴시알을 받고 산 세바스티안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니, 그만 걷고 싶은 마음도 생겼지만 그래도 산 세바스티안까지는 걸어보기로 했다.
산 세바스티안이 5km 남짓 남았을 때 힘이 다 빠져버렸다.
도저히 못 걷겠다 싶을 때 나타난 휴식처.
열두 지파(http://www.twelvetribes.org)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마테차에 오렌지를 섞은듯한 음료가 참 맛있었다.
뱃속에 음식이 들어가니까 산 세바스티안까지 걸을 힘이 생겼다.
덕분에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했다.
산 세바스티안은 인구가 20만도 안되는 작은 도시지만, 미식가라면 꼭 들러봐야 할 도시로 꼽힌단다.
맛집이 워낙 많아서라고 하는데, 아무 데나 들어가도 평균 이상의 맛이었다.
미슐랭 가이드도 이곳을 놓치기 싫었는지 치열하게 맛집투어를 하고는 30곳이 넘는 맛집을 엄선했다.
시간과 돈의 여유가 있다면 모든 맛집을 들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러나 단지 며칠 머물다 가는 여행자에겐 해변에 누워 햇볕을 받고, 바다에 뛰어들어 파도를 즐기는 것 또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만큼이나 즐겁기에 유명한 맛집을 한곳만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을 3개 준 맛집이 산 세바스티안에는 무려 세 군데나 된다.
마르틴 베라사테기, 아켈라레 그리고 아르작.
셋 중에 어디를 가볼까 고민하다가 아르작을 가보기로 했다.
바스크 요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는 평을 본 것 같았고, 트립어드바이저 평도 썩 괜찮았다.
그리고 아르작은 중심가에서 제일 가까웠다.
찾아가기 부담 없어서 설령 아주 특출나게 맛있지 않더라도 실망을 덜 할 것 같았다.
일단 분위기를 보려고 점심 즈음 들렀다.
조용한 동네에 평범한 건물.
아르작이라는 간판도 그리 튀지 않고, 손님도 눈에 띄지 않는다.
혹시 바로 식사가 되는지 물었더니 당일 예약이 모두 차서 안 된단다.
다행히 이틀 후 점심에 예약이 된다기에 예약을 걸었다.
"까바 한잔 하시겠습니까?"
의도치 않은 낮술을 하고 돌아왔다.
사실 아르작에 발을 디디기 전까지는 고민을 많이 했다.
'밥 한 끼에 너무 큰 돈을 쓰는 건 아닐까?'
끼니를 때우는 값이라면 지나치게 큰돈이다.
그렇지만 미슐랭 가이드 3스타 요리라는 특별한 경험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이틀은 금방 지나갔고 입맛을 다시며 아르작을 찾았다.
뭐가 제일 입맛에 맞을지 알면 단품을 주문하는 것이 좋겠지만, 다양한 음식을 조금씩 맛보려고 아르작 테이스팅 메뉴를 주문했다.
요리가 나올 때마다 감탄했다.
우선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고, 뛰어난 맛으로 미각을 만족하게 한다.
아르작의 한 접시 음식에 얼마나 큰 노력이 들어가는지 알겠다.
요리마다 이야기를 담으려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과연 미슐랭 3스타에 오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파도치는 바다화면을 띄운 태블릿 위에 생선 요리를 올려 나왔을 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고 한 번쯤은 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회와 비둘기요리에선 약간 비린맛이 나서 아쉬웠지만, 나머지 요리는 다 맛있었다.
둘이서 테이스팅 메뉴와 까바 두잔을 마시고 500유로가 나왔으니 가격은 상당히 부담스럽다.
만약 산 세바스티안에 다시 가서 열흘을 지낸다면, 아르작을 가기보단 네스트로 바에서 소고기를 10번 먹겠다.
그건 이미 아르작을 경험했기 때문이고,
만약 아르작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면 그 경험을 위해 한 번은 꼭 들르겠다.
음식의 맛과 멋. 그리고 장인정신을 엿볼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르작.
이곳에서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요리를 맛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