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겨울을 온 몸으로 느낀다. 한라산 성판악 코스.
작년 3월에 성판악-관음사 코스로 백록담을 다녀오고는,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백록담에 오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사람 일이 어찌 예상 대로만 이뤄지랴?
1월. 겨울의 한복판에 백록담을 올랐다.
작년 3월 등반을 기준으로 짐을 챙겼다.
미끄러움을 방지하는 아이젠과 신발에 눈이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스패츠는 필수.
얇은 장갑과 두꺼운 장갑을 챙겼다.
작년에 관음사 코스를 내려갈 때 스틱이 없어 고생했던 기억 때문에 스틱도 한 벌 챙겼다.
하의는 기모 타이츠 위에 여름용 얇은 바지를 입었고,
상의는 기모 베이스에 얇은 재킷과 도톰한 재킷, 마지막으로 바람막이를 걸쳤다.
털모자와 플리스 넥 워머까지 챙겼으니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다.
작년 3월은 따듯한 편이었으므로, 이 정도면 더우면 더웠지 춥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작년 3월 날씨가 기적처럼 좋은 날이었던 거다.
아침 일곱 시가 좀 덜되어 성판악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자리가 없다.
갓길에 조심히 주차하고, 버스정류장에 옹기종기 모여 눈보라를 피하며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했다.
산악회에서 오신 어떤 분이 일행에게 말했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지만, 날씨가 이런데 꼭 강행하는 게 능사는 아닐 거 같아요.”
그래도 죽는 게 아니라면, 기왕 온 거 설령 죽을 만큼 고생하더라도 올라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 입구에서 되돌아가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작년엔 한참 올라가다가 아이젠을 꺼내 들었는데, 이번엔 입구부터 아이젠을 차고 걸어야 할 정도로 바닥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였다.
작년 3월엔 초입이 돌 바닥이었는데, 이번엔 푹신푹신해서 쿠션이 좋아 오르기가 한결 수월하다. 눈 쌓인 나무를 스치며 첫걸음을 내딛는다.
한라산은 지금이 성수기인가 보다. 작년 3월에 왔을 때보다 사람이 세 배는 많아 보였다. 좁은 길을 따라 한 명씩 오르는 모습이 런웨이를 닮았다.
수려한 자연 경관과 더불어 다양한 등산 패션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진달래밭 대피소.
대피소 안은 뜨거운 컵라면으로 추위를 좀 녹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서 있을 자리도 없다.
배가 딱 고플 시간이라 여기서 따듯한 것도 좀 먹으면서 쉬다 가고 싶지만, 여기서 쉬면 정상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사람이 너무 많아 분명 길이 막힐 거다.
진달래 대피소를 지나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다.
거센 바람이 얼굴을 때릴 때면 자꾸만 꽃 이름이 입에서 맴돈다.
‘개나리. 개나리... 이런 개나리.’
판타지에나 나올법한 멋진 겨울 왕국이 눈 앞에 펼쳐진다.
아름답다.
사스콰치나 예티 등이 사는 지역으로 어울린다.
사람이 살 곳은 아니다.
특히 저 멀리 눈보라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모습은 참 신비로운데,
저게 저 멀리만 지나가는 게 아니라 얼굴을 강타하고 지나가기도 한다.
한겨울 산행에는 꼭 고글을 챙겨야겠다.
바람에 떠밀리다가 간신히 줄을 잡고 다시 한 발자국을 딛는다.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 정상에 올라가는 이유가 뭘까.
평소에 살아있다는 게 너무 당연해서 그 고마움을 잊고 지낸다면,
궂은 날씨에 한라산을 한번 올라보면 좋다.
살아서 숨 쉬고 따듯이 먹고 자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새삼 느끼는 계기가 되니까.
나만 추한가 했더니 모두 눈물 콧물을 줄줄 흘려서 얼굴에 고드름을 만들고 올라가고 있다.
“크크크크.”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너무 추워서 입이 얼었는지 입이 크게 벌어지지 않았다.
웃음소리가 꽤 컸음에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바람 소리에 묻혀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까닭이다.
바로 옆 사람에게도 소리를 질러야 할 판이다.
“너 콧물이 얼었어. 크크크크.”
물론 나도 그렇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작은 건물 옆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바람을 피하고 있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지고 걷기도 힘들지만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백록담은 봐야지.
바람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백록담에 오르면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
백록담 바로 앞에서 전세 낸 마냥 사진을 찍어도 된다는 것!
두세 장 찍었더니 배터리가 다 달았다.
몸을 덜덜 떨며 힘겹게 갈았지만, 또 두세 장을 찍으니 꺼졌다.
온도가 너무 낮았나 보다.
이럴 때 사진을 찍으면 재미있는 사진이 좀 나올 텐데 아쉬웠다.
아쉬워도 별수 있나.
우선은 살아야겠으니 정상에서 내려왔다.
기차놀이를 하는 것처럼 길게 늘어서 오르는 사람들과 달리 내려갈 땐 한산하다.
대피소에서 쉬지 않고 올라갔다가 오길 잘했다.
계단 부분을 지나니 바람이 좀 약해져서 여유를 가지고 카메라를 꺼내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온갖 갈등을 겪지만 결국은 해피엔딩 같은 풍경이다.
진달래 대피소에서 조금 쉬며 허기를 달래고 내려왔다.
성판악 코스로 다시 내려오니 경사가 완만해서 스틱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완만한 대신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길다.
진달래밭 대피소부터 백록담까지가 볼거리가 많은데, 그 때문에 성판악을 오르기는 부담스럽다.
다음에 또 백록담을 오른다면, 튼튼한 스틱을 챙겨서 관음사-관음사 코스를 고려해봐야겠다.
by 月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