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비가 오나?'
새벽 5시.
천둥이 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침대가 20개 정도 되는 방이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짐을 싸고 있었다.
단 한 사람.
내 옆 침대의 천둥 신 토르는 세상 모르게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더 자고 싶어 눈을 감아보았지만, 어지간해야지.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싸고 나왔다.
밖은 어두웠지만, 가로등 불빛 덕에 방향을 잃지는 않았다.
동트는 새벽.
이렇게 이른 시각에 밖에 나와본 게 얼마 만인가?
차가운 공기를 깊숙이 들여마시며 발걸음을 옮기자 햇살이 앞길을 밝혀주었다.
일찍 나온 덕인지 다음 마을인 포베냐에 도착할 즈음이 아침을 먹을 시간이다.
또르티야와 카페 솔로.
간단하게 시장기를 달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포베냐 파도가 좋은지 아침부터 서핑을 즐기는 사람이 곳곳에 보였다.
풍경에 홀려서인지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이정표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빨간 지붕에 빨간 대문. 그리고 빨간 자동차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사진을 한 장 찍고 지나쳐갔는데!
바로 그 집 옆으로 들어가야 했었다.
비록 조금 헤매긴 했지만,
포베냐(Pobeña)에서 엘 아야(El Haya)로 향하는 이 길이 정말 아름답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 길에서 단 하루만 걸어야 한다면, 이 길이다.
드디어 바스크 지방을 지나 칸타브리아 지방까지 왔다.
오는 길에 염소 무리를 만났다.
좁은 외길에서 만났는데 겁을 먹었는지 소리를 빽빽 지르며 정신없이 주위를 맴돌았다.
체구가 작긴 하지만 뿔 달린 녀석이 미친 듯이 뛰어다니니 손에 땀이 났다.
카스트로 우르디알레스 초입까지는 다리에 힘이 남아있었는데, 알베르게까지 거리가 한참이다.
도저히 힘이 안 났지만,
길거리에서 파는 츄러스를 사 먹었더니 힘이 조금 난다.
역시 츄러스는 밖에서 파는 게 맛있다.
어렵사리 알베르게에 도착했으나, 방은 이미 가득 찼다.
그러나 친절한 호스피탈레로는 알베르게 뒤편에 텐트 몇 동을 세워두고, 지친 여행자들에게 몸을 뉘일 자리를 내주었다.
텐트에 짐을 풀고 순례자 메뉴를 먹으러 나갔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가까운 데서 든든하게 먹으면 그만.
주방이 준비되는 동안 시원하게 맥주 한잔하고 순례자 메뉴를 주문했다.
볼로네즈 파스타와 마카로니 참치 샐러드로 음식이 들어온다는 신호를 주고 두번째 메뉴를 골랐다. 뭐가 맛있을지 몰라서 추천을 부탁했더니 아저씨가 생선이 맛있다고 하신다.
그래서 금붕어(dorada) 와 유럽농어(lubina) 요리로 결정!
신선한 생선인지 맛이 정말 좋았다.
후식은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치즈 플랑(flan) 과 초콜릿 트뤼플이 디저트 전문점 수준으로 맛있었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고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도 되겠냐고 여쭈었더니 잠시만 기다리라며 술을 한잔 따라주신다.
이 지역의 술인 오루호(orujo) 다.
맛에 감탄하고 친절함에 또 한 번 감동했다.
그런데 상호가 기억나질 않는다.
식당 위치는 Calle de Silvestre Ochoa, 17, 39700 Castro Urdiales, Cantabria다.
지금은 폐업했다고 나오는 Nuevo Barlovento 였던가, 아니면 지금 장사하는 Sidrería Pachín de Melás 였나?
그러나 그 맛을 혀는 기억하리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등산화에 발목이 자꾸 쓸려서, 누군가 숙소에 두고 간 운동화를 신고 출발했다.
초반부터 좁은 산길이 나왔는데, 가시가 달린 나무도 많아서 다리가 이리저리 쓸리고 피도 나고 고생이 많았다.
그래도 뭐 생명에는 큰 위협이 없었는데,
잠시 후에 커다란 난관이 나타났다.
황소.
주황색 우비에 빨간 배낭을 멘 사람을 만난 황소는 화가 단단히 났다.
이럴 땐 정말 차분해야 한다.
우선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소가 마음을 풀기를 기다려 본다.
소와 눈을 맞추고 웃어보지만,
아무래도 누군가 죽거나 눈앞에서 사라지기 전에는 그 분노가 사라지지 않을듯하다.
길이 아닌 곳으로 조심조심 걸어서 소를 피했다.
소가 순하다니.
나는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순한 황소를 만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콧김을 뿜거나,
이번 황소처럼 발 구르기를 한다.
위협적이다.
무사히 숲길을 빠져나오니, 카스트렉사나(kastrexana)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 갈림길이 나오는데,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포르투갈레테 방향이다.
다음 도시는 황량한 느낌의 바라깔도(Barakaldo)라는 곳이다.
차가운 느낌의 공업 도시인데,
이 도시를 나갈 때쯤 이름 모를 공원에 피카소의 게르니카 조형물이 몇 개 세워져 있다.
위대한 예술가가 나온다면,
우리 후손은 위대한 작품을 어려서부터 가까이서 보고 느끼며 자란다.
위대한 예술가는 쉽게 탄생하지 않는다.
음악상에서 받은 트로피를 팔아야 할 정도라면 그런 예술가가 나오기는 더욱 어렵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포르투갈레테 바로 앞 도시인 세스타오(Sestao)는 무척 암울한 분위기다.
옆 건물과 손 한 뼘 간격으로 건물이 다닥다닥 숨 막히게 붙어있다.
그리고 그 건물 앞에 서성이는 피곤한 기색의 사람들 표정에 어두운 기운에 휩싸이는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에펠이 설계한 비즈카야 다리(Vizcaya Bridge)가 보인다.
포르투갈레테에 도착이다.
공식 알베르게는 문을 닫았고 bide ona라는 사설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포르투갈레테 언덕에 무빙워크가 설치되어 있는 게 인상적이다.
야외이고 비도 내리는데, 고장 안나고 잘 돌아가다니 신기하다.
저녁은 순례자 메뉴를 파는 jardin에서 먹었다.
10.9유로 가격치곤 푸짐한 저녁 식사라 나름 만족스럽다.
Dia에 들러 숙소에서 마실 와인 한 병과 치즈 한 덩이를 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유리창에 붙은 녹색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El paso.
첫걸음이 힘들다.
우선 발걸음을 떼면 그곳이 어디든 도착하게 된다.
이 표지판이 무얼 말하려고 하는 걸까?
"내 자동차를 밟고 지나간 게 네놈이렸다? 이리와서 좀 맞자!"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A : 공을 얼굴에 찬다.
B : 우선 집에가서 생각해본다.
지나가다 만난 이 견공은 바디랭기지에 능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렇게 물어왔다.
'비 맞으면서 걸으면 xx힘들지?'
빌바오 시내에서 알베르게까지 짧은 코스.
아침 느즈막이 숙소에서 나와 여유를 부린다.
추로스가 먹고 싶어 거리를 뱅뱅 돌다가 브라질이라는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슈퍼에서 파는 추로스를 전자레인지에 데운듯한 맛이고, 핫초코와 함께 나오는데 5유로다.
일반적인 카페에서 커피와 간단한 아침 세트가 3.5유로 정도 하는 것보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맛까지 없다.
기분이 상했지만, 처음부터 정확한 가격을 안 물어 봤던 것이 실수다.
무릎은 여전히 아프다.
약국에서 호랑이 연고를 10유로나 주고 사서 바르니, 기분 탓인지 좀 나아진다.
조금 걷다가 패스트푸드점에 들러 맥주와 오징어 튀김을 먹고,
또 한 삼십 분 더 걷고는 슈퍼에 들러 음료수와 물을샀다.
이제 알베르게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반가운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길이 끊겨서 알베르게에 어떻게 가야 할지 난감했다.
직감을 따라 걷는다.
하루 중 제일 뜨거운 시간.
여행 중 가장 뜨거운 날.
아스팔트 길을 걷는 건 괴롭다.
더워서 짜증도 난 데다가 길을 못 찾는 불안함이 겹쳐 불쾌한 기분이 수증기처럼 뿜어져 나올 즈음.
다시 반가운 노란 화살표를 만났다.
그 화살표는 '108개도 넘는 계단을 오르면 원하는 것을 얻을지니, 여행자여 절할지어다.' 라며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향해있다.
조금 오르다 쉬고,
또 한 번 쉬었다.
정말 이 길이 맞는가 의문이 들 때 다행히도 알베르게 건물을 보았다.
호스피탈레로는 우리를 반겨주었고,
짐을 풀고 샤워를 하니 기분이 상쾌하다.
네덜란드 남부 도시(아스파라거스 원산지 바로 옆)에 사는 리쳐드와 58번 버스를 타고 빌바오 시내 구경도 잠시 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맛좋은 Rioja 와인도 사 왔다.
염소 치즈도 하나 샀는데, 기대했던 맛은 아니었다.
저녁은 호스피탈레로들과 여행자들이 한데 모여 또르티야와 샐러드에 와인을 곁들여 먹었다.
오늘 여행의 시작은 험난했으나 끝은 좋았더라.
내일도 즐거운 여행이 계속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