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과 나는 같은 학년으로 국민학교에 다녔을 테고, 어쩌면 내가 칠판지우개를 터는 동안 수많은 김지영 씨가 내 곁을 스쳐 지났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중학생 때나 고등학생 때 분명 여러 차례 그녀들과 마주쳤을 텐데. 아니 어쩌면 그 이후라도....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이 주변의 여자 친구들, 선후배들, 그리고 작가의 모습과도 많이 닮았다고 했지만 왜 나는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소설 속 김지영 같은 인물이 그려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건 내가 남자라서 여성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주변에 김지영 씨 같은 사람이 없어서일까?
물론 살면서 누군가에게 위협을 당하거나 거지 같은 경험을 했던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겠지만, 적어도 성인이 된 이후에 김지영 씨처럼 불행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는 여성이 처하는 여러 문제를 구체적 자료를 들어 드러낸다.
확실히 여성은 성희롱이나 성폭력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소설 속 바바리맨이나, 버스까지 따라 탔던 미친놈. 그리고 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하는 방범 요원 등은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범죄를 시작으로 보다 강력한 범죄가 일어나기 쉬우며,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어떤 남성이 작정하고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여성은 큰 위험에 처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술을 마셨던 아니던 상대방이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살다 보면 태도가 단정하고 깔끔하지만, 뒤에서는 헐뜯는 악당들도 마주치게 되고, 때로는 눈앞에서 자기 목소리가 더 크니 자기 말을 들으라는 불합리한 인간도 만나게 된다.
거래처 부장처럼 자기가 갑이라고 생각되면 다른 사람을 마구 부리려는 사람도 꽤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게 당연한 권리인 줄 알고, 이성이든 동성이든 간에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이빨을 터는 작자들이다.
힘의 우위에 있는 누군가가 여차하면 힘을 행사할 생각으로 상대방의 선택권을 박탈하는 것은 정말 억울하고 손 떨리고 재수 없는 일임이 틀림없다.
뭐 이런저런 재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누군가는 김지영 씨처럼 속으로 삭이고, 누군가는 강혜수 씨처럼 부당함을 소리쳐 외치고, 누군가는 김은실 팀장처럼 더 적극적으로 그 상황을 바꾸려고 한다.
모두가 똑같이 대처할 수 없다. 사회에서는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더럽게 치사해도 다른 성취를 위해서 잠깐 눈을 감아야 할 수도 있고, 다 포기하고 맞설 수도 있다. 이건 개인의 의지와 선택에 달린 일이다.
82년생 김지영의 1982년부터 2011년까지를 읽으며, 사회에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문제들을 잘 집어준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82년생 김지영 그녀가 결혼하는 2012년부터는 전혀 공감이 안 된다.
결혼 전에 서로에 대해 더 알아봐야 하지 않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동반자로서 함께 살아갈 이유가 있나?
자기 인생인데 서로에 대한 신뢰와 확신도 없이 될 대로 되라 슬롯머신 돌리듯 결혼을 할 수가 있나?
아이를 가지는 부분에서도 어처구니가 없다.
"그렇겠네. 오빠도 힘들겠다. 근데 나 오빠가 돈 벌어 오라고 해서 회사 다니는 건 아니야. 재밌고 좋아서 다녀. 일도, 돈 버는 것도."
라는 말을 하고는 덜컥 애를 가지다니?
만약 둘 사이에 서로 만족할 만한 협의가 없었다면, 합의점을 찾을 때까지는 피임에 신경 써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그런 합의도 없이 남자가 피임을 거부한다면, 늦기 전에 이혼하는 게 나은 선택이리라. 배려라곤 없는 사람과 함께 사는 건 혼자 사는 것만 못할 테니까.
그런 선택의 시간을 다 지나 보내고, 세상 밖으로 아이가 나올 때쯤 해서 어떻게 육아를 할지에 대해 부부가 이야기를 나눈다니. 불행 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강 건너에 목적지가 있다면 강을 어떻게 건널지, 어떤 위험이 있는지 미리 알아보는게 당연하다.
'강을 건너다 물살이 갑자기 급해지거나 발을 헛디뎌서 빠져 죽을 수도 있는데 어떤 준비를 해야 하지?'
'수영을 배우고 몸통에 밧줄을 묶어서 건널까?'
'뗏목이나 배를 만들까?'
이런 준비를 하고 건너도 시행착오를 하기 마련인데, 김지영 씨와 정대현 씨 부부는 '어! 강이다! 일단 뛰어!' 그러고 뛰어들었다.
그럼 여유롭게 강을 건너기는 당연히 어렵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밖에 없다.
둘은 함께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이상한 결론이 났다.
'육아는 누가 전담할지, 비용은 얼마나 들지,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를 커다란 종이에 차분히 정리해 갔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그 한 사람은 당연히 김지영 씨였다. 정대현 씨의 직장이 더 안정적이고 수입이 많기도 하고, 그런 모든 이유를 떠나 남편이 일하고 아내가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보자면 이 사람들은 신생아가 태어나면 약지 손가락을 자르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서슴없이 손가락을 자를 것이다.
가족의 일은 가족 구성원이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지 일반적인 걸 따를 일이 아니다. 그리고 안정을 포기하느니 자기 삶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일반적이기 때문이라는 변명으로 합리화했다.
김지영 씨가 결혼할 무렵부터 일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인과다.
그녀는 세 번의 선택을 했다.
첫째, 정대현 씨와 결혼하기로 했다.
결혼 후 생활이 전혀 어떨지 상상이 안 가는 사람이라면 결혼하면 안 된다.
하물며 결혼하면 나빠질 것으로 보이면 더더욱 안 된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괜찮았다.'라는 소설속 내용을 보건대 김지영 씨는 부정적인 미래가 예상되는데도 결혼을 했다. 왜 그랬을까?
둘째, 아이를 낳기로 했다.
아이를 낳으면 자신만 잃을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고, 아이를 낳기보다는 그것들을 지키고 싶다면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되었다.
아이는 정말 가지고 싶지만 키울 자신은 없다면 둘이서 잘 상의를 하고 합의점을 찾은 뒤 아이를 가졌어야 했다.
행여나 정대현 씨가 강압적으로 아이를 가지게 했다면, 그는 감옥에 가는게 맞다.
셋째, 육아하기로 결정했다.
아이를 가진 뒤에 부부간에 많은 이야기를 했다.
경제적인 이유든 다들 그러니까 그래서든 간에 결국 김지영 씨가 아이를 돌보기로 했다.
물론 그 결정은 번복될 수 있다.
"막상 키우다 보니까 너무 힘들다. 얼마 있다가 나랑 바꿔줘."
이렇게 역할을 바꾸면 되는 것 아닌가?
김지영 씨는 결혼한 뒤로 어쩔 수 없다며 핑계만 대고 있다.
82년생 김지영 그녀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위협으로만 받아들인다.
세상엔 엿 같은 일이 많다.
누군가 빅엿을 줬을 때 "나는 괜찮으니 당신이나 드세요."
이렇게 사이다 발언을 하면 좋겠지만, 살다 보면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어쩔 수 없이 엿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생강엿을 먹을지 호박엿을 먹을지 정도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주위를 돌아보면 엿이면 다 엿이지 포기하고 아무 엿이나 먹는 사람은 인생이 불평이고,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고민하는 사람은 기회를 찾더라.
소설을 좋아하지만, 많이 읽는 편은 아니다.
아니 딱히 소설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편이 맞겠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눈 앞에 펼쳐지는 영화나 애니메이션도 좋고,
콘텐츠와 상호작용을 하는 게임도 좋다.
소설에서 눈에 보이는 건 글자 뿐이기에 장면을 상상해야 한다.
이 부분이 다른 시청각 콘텐츠에는 없는 소설만의 특별한 재미다.
모옌.
그의 글에서는 소리가 들리고, 생생한 장면이 펼쳐진다.
모옌은 묘사가 너무 뛰어나서 독자가 다른 엉뚱한 상상을 할 여지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궁금한 부분만은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서,
독자가 단 한 부분에 집중해서 상상하도록 우리를 이야기 속으로 이끈다.
그가 쓴 소설 한 편을 읽고 나면 무언가에 홀린 듯 정신이 몽롱하다.
모옌.
글 참 잘 쓴다. 스토리텔링의 고수다.
모옌 중단편선 - 책갈피
허우치가 개기 일식이나 헤일 봅 혜성은 이미 작년에 있었던 일이 아니냐고 말하자 동료들은 멍청이라고 말하면서 도무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비난했다. 작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올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 그들의 비난이 이어지자 허우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멍청하고 둔하며, 근본적으로 날로 비약하는 사회에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허우치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자 멜빵바지 차림에 상반신이 유별나게 길지만 다리는 오히려 유난히 짧은 여자가 그에게 먹으로 까맣게 칠한 유리를 건네면서 다른 동료들에게 말했다.
"허우 동지는 그래도 근본은 올바른 동지야. 당신들이 욕하면 안 되지!"
청년들이 말했다.
"우리가 욕하는 것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소, 허우 동지?"
허우치는 연신 그들의 말이 맞다고 했다. 사람들이 이어서 외계인에 대해 큰 소리로 토론을 벌였다. 허우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정신을 차릴 수 없어 마치 술에 취하거나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 청안대로 위의 나귀 타는 미인
진정한 미인이란 그저 감상의 대상이지 껴안고 노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진정한 미인은 언제나 깡패나 건달, 못난이들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다. 속담에 이르길, 훌륭한 사내대장부는 좋은 아내를 얻기 힘들고, 게으른 사내가 미녀를 얻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그렇다! 진주 목걸이는 모두 돼지 목에 걸려 있다.
- 청안대로 위의 나귀 타는 미인
"너희 인생이 잘나간다고 우리 인생은 찌그러졌는 줄 알아? 쌀 먹는 사람도 살지만 쌀겨 먹는 사람도 살고, 고급한 인간도 살아가겠지만 저급한 인간도 살게 되어 있어." - 백구와 그네
무슨 일이든 하려면 잘해야 하고 정성을 다해야지, 일을 하면서 잡생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할아버지의 철학이었다. - 큰바람
원래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근일 년간은 책을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다.
대신 드라마나 영화, 게임 등 다른 콘텐츠의 소비가 늘었다. 이런 텍스트가 전부인 책보다 소비하기가 쉽다.
대신에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사유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책은 읽으면서 이미지를 떠올리고 어떤 질문에 자문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지만, 다른 콘텐츠는 책에 반해 그런 시간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지적자본론이란 이 책은 도서관에 갔다가 새로 들어온 코너에서 우연히 집어 들었다.
책이 작고 얇아서 유난히도 읽기 싫었던 요즘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을 것 같아서다.
에어컨 시원하게 나오는 도서관 열람실에서 책을 읽는 것은 무더위를 피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니 말이다.
지적자본론을 읽는 것은 컬쳐 컨비니언스 클럽(Culture Convenience Club)이라는 회사가 해온 고민과 결과를 들어볼 즐거운 기회였다. 나도 스타트업에서 서비스를 만들어가며 '이게 과연 고객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므로 몰입이 더 잘 되었다.
마스다 무네아키 개인의 생각을 듣는 것도 재미있었다.
약속, 감사, 자유, 부산물, 효율, 행복 등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는데 다른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눌 기회가 평소에 많지 않다.
심지어 얼마 전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마신 술 이름이 '나 별일 없이 산다'였다. '요즘 어떻게 지내?' 등의 안부로 시작해서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지는 게 보통이다. 물론 그 속에는 각자 삶의 철학이나 방향이 담겨있긴 하지만 말이다.
행복이 목적이라고 하지만 그 행복이 무엇인지에 관해 지속해서 자문하고 고민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꼭 행복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끊임없이 물음을 던져야 답을 얻는다.
지적자본론 책갈피 - 책갈피
일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을 해서 돈을 벌려고 노력한다. 이 경우, 행복이 목적이고 금전은 수단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착각해 버린다. 그리고 그 목적에 사로잡혀 피폐해지고 행복에서 점차 멀어진다.
사람들이 수단과 목적을 착각하는 이유는 그쪽이 편하기 때문이다. 행복이 목적이라고 하지만 그 행복이 무엇인지에 관해 지속적으로 자문하고 고민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간단히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금전 쪽으로 목적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상품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기능, 또 하나는 디자인이다. 어떤 상품이든 마찬가지다. 시험 삼아 유리잔을 예로 들어 보자. 액체를 담는 것이 기능이고, 손잡이가 없는 유리 제품이라는 것이 디자인이다. 약간 철학적인 이야기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물건에 성질을 부여하는 것이 '형상'이고 그 물건의 소재는 '질료'인데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 사회의 상품도 그 성질을 결정하는 기능과 외관을 구축하는 디자인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그중 어느 한쪽이 결여되어도 상품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디자인은 부가가치'라고 주장한다면, 물건의 이런 성립 관계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아무리 세련된 디자인을 지닌 유리잔이라고 해도 결국 '액체를 담든ㄴ다.'라는 매우 단순한 기능을 지닌 물건이듯, 기획에 관한 이런 질문과 해답 역시 본질적으로는 매우 단순하다. 기획의 가치란 '그 기획이 고객 가치를 높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기업을 성립시키는 기반은 재무자본이었다. 퍼스트 스테이지나 세컨드스테이지에서는 '자본'이 당연히 중요하다. 충분한 상품과 플랫폼을 만들려면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비 사회가 변하면 기업의 기반도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만으로는 '제안'을 창출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지적자본'이다. 지적자본이 얼마나 축적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그 회사의 사활을 결정한다.
'만남'은 로맨틱한 말이다.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 그런 우연이나 행운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한 가지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고도의 접객 담당자들)은 보수나 대우리는 외적 조건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외적 조건은 당연히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전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전제 위에 그들이 '재미있을것 같다.'라고 느낄 수 있는, 구심력을 갖춘 이념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 열쇠다.
마침내 현실 세계가 인터넷에 대해 우위에 설 수 있는 여지를 아직 확실히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즉시성이다. 현재 주문한 상품을 당일 배송하는 서비스가 확대되고 있기는 하지만 인터넷의 경우, 클릭한 상품을 그 자리에서 바로 입수할 수는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대기 시간이 발생한다. 가전제품을 인터넷을 통해 구입하는 사람은 다수 있지만, 지금 당장 조리하고 싶은 신선한 식품을 그때마다 주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즉시 입수하지 못할 경우 가치가 줄어드는 상품은 인터넷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는 직접성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도서관을 예로 들어 보겠다.
우리는 다케오 시립 도서관의 지정 관리자가 되었을 때, 장서의 진열 방법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경하였다. 18만 권에 이르는 서적을 거의 모두 개가식으로 만든 것이다.
도서관의 장서 관리 방식에는 개가식과 폐가식 두 종류가 있다. 폐가식인 경우, 장서는 일반 이용객이 들어갈 수 없는 서고 않에 진열되어 있어 대출 희망자가 의뢰를 하면 사서가 해당 서적을 서고에서 꺼내 온다. 거기에 비해 개가식은 일반 이용객도 자유롭게 서적을 꺼낼 수 있도록 공개 서가에 장서를 진열한다. 리뉴얼 이전까지 다케오 시립 도서관의 장서중 약 절반 정도가 폐까식이었는데, 이제 개가식으로는 바뀌었다.
그 이유는 막대한 서적을 직접 마주했을 때에 느껴지는 순수한 감동을 소중하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짜로 새로운 다케오 시립 도서관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우와!"라거나 "세상에!"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정면의 드넓은 벽면을 가득 메운 막대한 양의 서적에 압도당하기 때문이다. 즉, 서적의 양이 직접, 방문객의 피부 감각에 호소하는 것이다.
폐가식 도서관에서는 이용객이 검색을 통해 해당 도서를 찾아 요청하면, 관리자가 일반인은 드나들 수 없는 서가로 가서 꺼내 온다. 인터넷상의 가상 매장과 비슷하지 않은가. 한편 개가식은 이용객이 직접 서적을 만져 볼 수 있는 공간에 장서가 진열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해당 서적을 찾거나, 원하는 책은 아니지만 흥미를끄는 비슷한 서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쪽은 물론 현실 세계의 매장에 대응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직접성만큼은 현실 세계가 인터넷에 대해 우위를 점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꿈만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꿈꾸었던 것이 현실 세계에 나타나는 것, 그것이 이노베이션이다. 어느 누구의 꿈에도 나타난 적이 없는 것은 절대로 실현될 수 없다.
단순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이 자유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성의 목소리를 따르는 자유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비지니스 역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효율과 행복은 다르다.
효율은 확실히 편리하고, 편리는 대부분의 경우 쾌적함을 이끌어 낸다. 단, 쾌적함과 행복은 등가가 아니다.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숲 속의 산책로를 지나가야 한다면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곳을 걸을 때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은 결코 효율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다, 어쩌면 효율과 행복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적자본이 대차대조표에 실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상쾌함과 고양감은 숫자로 측정할 수 없다. 수량화할 수 없는 감각이야말로 행복과 가까운 것이 아닐까.
약속을 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것을 지키기는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것 없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의지가 강한 사람은 드물다.
어딘가 '자유'와 '사명'의 관계와 비슷하지 않은가. 자유를 입에 담기는 간단하지만 지속적으로 자유를 유지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관철하려면 사명감이 필요하다.
자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을 얻으려면 신용이 필요하다. 약속을 지키고 감사를 잊지 않는 인간으로서 신용을 얻어야,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인간은 비로서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