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궤메스에서 산탄데르. (Camino del Norte - Güemes to Santander)
도보여행의 마지막 날.
바닥에 물기는 남아있지만,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는다.
걸어야 할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발걸음이 가볍다.
다 쓰러져가는 집을 판다는 광고를 보고는 이런 작은 마을에서 삶은 어떨지 상상해 본다.
푸른 하늘과 풀 내음이 집안 가득 흘러들겠지.
집에서 오십 걸음만 걸어도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거리 여기저기서 햇볕을 쐬는 동물들과는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며 지나겠지.
때론 낚싯대 들고 갈매기 나는 바닷가로 나가 적당한 바위에 서서는 물길 따라 흔들리는 찌를 바라보며 멍하니 한나절을 보내겠지.
아침은 간단하게 빵과 약간의 과일로 해결하고, 일하러 나가야지.
일?
이런 곳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나?!
현실에 벽에 부딪힌 생각의 파도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다.
마지막 길에서 마주한 바다는 거칠었고, 깎아지른 절벽과 함께 나를 압도했다.
위대한 자연을 피부로 실감했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란 참 작고 약한 존재인데,
왜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더 커 보이려고 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작은 자들의 본능적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그토록 멀어 보였던 목적지가,
며칠 만에 코앞으로 다가왔다.
작은 배에 몸을 실으며 지나온 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그동안 험하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적도 있지만,
덕분에 이렇게 다 왔노라고.
산탄데르.
오랜만에 커다란 도시를 마주하니 어리둥절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푸짐한 해산물 모둠으로 배를 채우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번 도보 여행은 여기까지다.
아침 여섯시 반에 알람을 맞춰두었는데 좀 더 일찍 눈이 떠졌다.
잠을 잘 잔 덕에 개운하다.
짐을 챙겨 노하를 벗어날 즈음 해가 떠오른다.
잠시 배낭을 내려두고 오렌지 하나를 까서 먹었다.
오렌지 색이 저기 막 떠오르는 태양과 닮았다.
햇살이 대지를 덮듯 오렌지 과즙이 입안을 덮는다.
온 몸에 에너지가 가득차서 힘차게 걸음을 옮기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방울 내리다 말겠지 싶었지만, 판초를 꺼내 입었다.
판초를 쓰자마자 소나기가 엄청나게 쏟아져 내린다.
하늘에 구멍이 난 걸까?
신발과 양말까지 몽땅 젖는 데는 오렌지 한 알 먹는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휑한 도로변이라 이 물벼락을 잠시 피할 곳도 없었기에, 젖은 신발로 찌그덕 소리를 내며 걸음을 내딛는 것 말고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궁둥이를 붙일 기회가 한참 동안 없었으나 이슬라를 지날 때 마침 허름한 버스 정류장이 눈에 띄었다.
낡은 의자 하나 덩그러니 놓인 좁은 정류장이었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지친 다리를 쉬게 했다.
한참을 걸어도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다.
사람마다 대처하는 방식이 다를 테지만, 나는 우선 확실한 표식이 보일 때까지는 계속 간다.
잘못된 선택이었을 때도 잦지만, 중간에서 책을 덮기는 싫다.
비극일지언정 결말을 보아야 새로운 시작도 있는 법이니까.
이번엔 다행히 바레요(Bareyo)로 향하는 도롯가에 노란 화살표가 보였다.
길을 따라가니 메루엘로(Meruelo) 알베르게가 나타났고, 달걀 지단을 넣은 샌드위치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갈림길이 많이 나왔지만 고민할 때마다 지역 주민이나 신부님이 방향을 알려주어서 궤메스 알베르게에 무사히 도착했다.
알베르게엔 수프와 빵, 와인, 빠에야 등 푸짐한 점심이 기다리고 있다.
든든하게 잘 먹고 나니 비가 또 한 차례 시원하게 내린다.
비 맞으며 걷는 건 괴롭지만, 편히 앉아 듣는 빗소리는 기분 좋다.
잘 먹었으니 씻고 낮잠을 좀 자야겠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벌써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밥 먹기 전에 에르네스토(Ernesto) 신부님이 궤메스에 알배르게를 세우게 된 과정을 들었다.
스페인 내전 때 가족이 칸타브리아로 이주해 와서 살다가 신부가 되기로 하고 공부해서 25살에 공부를 마치고는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잠시 신부로 지내다가 여행을 떠났다.
세계여행을 하며 여러 사람을 만나고 형제애와 사랑이 가득한 따듯한 공동체가 답이라는 생각에 알베르게를 세웠다고 한다. 순례자를 위한 알베르게는 아니었고 지역 공동체를 위한 알베르게로 지역 공동체를 운영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어려운 나라를 돕는다. 순례자가 이 알베르게를 찾은 건 17년 전이 처음인데 그로부터 이곳을 방문하는 순례자가 계속 늘어났다고 한다.
초반엔 한 해에 200명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요즘에는 한 해에 만 명 가까이 다녀간단다.
산탄데르로 가는 길에 관해서도 이야기 해 주었다.
산탄데르를 지나서 좀 가다 보면 걸어서 건널 수 없는 강이 나오는데 강 위에 다리가 하나 있단다.
다리를 건너는 건 트램 한 정거장이고 1.5유로란다. 무임승차로 걸리면 걱정하지 말란다.
산토냐 교도소에 갇혀 콩을 심으면 된단다. 그럼 그 콩을 팔아서 과테말라 학교 교육 재정지원에 쓰인다고, 좋은 일 좀 하란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은 수프와 감자요리다.
같은 테이블에는 바스크 온드라이바(아레나 위) 에서 온 경찰관 아저씨가 앉았는데 48살 답지 않게 젊어 보였다.
스페인은 휴가가 30일인데 자기는 경찰이라 50일이란다. 그래서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다닌다고.
여행 초반에 만난 파릇파릇 독일인 20대 캠핑 커플도 다시 만났다. 산탄데르에서 여행을 마치고 발렌시아의 친구 결혼식에 간단다. 풋풋하다.
어떤 길이든 같은 방향을 향해 걷다 보면 한 번 만났던 사람들을 또다시 마주치게 된다.
어제의 추억에 오늘의 반가움을 더해 맞이하고 내일을 넘겨짚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웃으며 또 만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