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현대 사회에서 살기 위해선 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어떤 만족을 얻기 위해 목표를 세워야 하고,
앞날을 미리 내다보아야 하기도 합니다.
목표가 달성되면 잠시나마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곤 더 큰 만족을 위해 다시 목표를 세워요.
운이 좋다면 몇 번 더 웃겠지만,
결국은 벽에 부딪힙니다.
그렇게 기대했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비통함에 빠져요.
요즘엔 알아야 할 것도 많습니다.
남들이 아는 걸 모르면 바보 소리를 듣기 십상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일까요?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 내린 판단의 집합입니다.
저는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되고 싶은 열망도 없어요.
굳이 지식을 머릿속에 구겨 넣어야 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머리보다 가슴으로 사는 게 행복하기 때문이지요.
아일랜드에서 지내는 동안, 모순투성이의 제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 내겐 아직 행복이 특별해서이고,
자유롭다고 떠드는 것도 아직 자유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속 자유며 행복을 외치고 있었지요.
이 책에서 크리슈나무르티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이제야 좀 감이 잡혀요.
글이나 말로 설명되는 건 한정된 것뿐이란 소리가요.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크리슈나무르티의 철학
어떤 관념(생각)이 있는 자리엔 감수성이 없는데, 관념이란 과거의 것이며, 그럼에도 현재를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음은 더이상 민첩하지도, 유연하지도, 주의 깊지도 않다.
어떤 것을 이해하려면 당신은 그것과 살아야 하고, 그것을 관찰해야 하고, 그것의 내용을 모두 알아야 하고, 그것의 본질, 구조, 운동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함께 살아보려고 한 적이 있는가? 있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 정적 상태가 아니라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과 더불어 살려면 당신의 마음 역시 살아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만일 마음이 의견들, 판단들, 그리고 가치들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을 수 없다.
현재에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의 즉각적 지각이며, 그것으로부터 쾌락을 찾는 일 없이 그 속에 있는 커다란 기쁨이다.
우리가 자유를 원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그것을 원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주 대단하게 만족시켜 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궁극적인 만족은 자기실현이라는 개인 특유의 관념이다. 우리가 정말 찾는 것은 전혀 불만족이 없는 만족인 것이다.
우리는 내적으로 가난하게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래야만 아무 요구, 아무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런 우리(있는 우리)와 그래야 하는 우리(있어야 하는 우리)를 비교한다. 그래야 하는 것(당위)은 우리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의 투영이다.
당신이 <나는 자유롭다>고 말하면 당신은 자유롭지 않다. 그것은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 그가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이미 지나간 어떤 것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자유는 원망,소원 갈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연스럽게 올 수 있을 따름이다. 당신이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 이미지를 만들어 내므로써 그걸 찾을 수 없다.
그걸(자유)을 만나려면 마음은 삶을 바라보는 법을 알아야 하며, 이것은 시간의 속박 없이, 의식의 영역 너머에 있는 자유를 위한 굉장한 운동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 속에서의 변화가 시간 속에서 이룩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 속에서의 질서가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고 하루하루 증가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질서나 평화를 가져오지 않으며, 그래서 우리는 점진성에 의해 생각하기를 그쳐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평화롭게 안주할 내일이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순간에 질서 있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진짜 위험이 있을 때 시간은 사라진다. 그렇지 않은가? 거기엔 즉각적인 행동이 있다.
당신은 시간이 무엇인지 아는가? 시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대순의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 시간을 아는가? 그것은 생각과 행동의 간격이다. 생각이란 분명히 자기 보호를 위한 것이다. 즉 그것은 안전하려는 생각이다. 행동은 언제나 즉각적이다. 그것은 과거의 것도 아니고 미래의 것도 아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때, 거기엔 사랑이 없다.
사랑할 때는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사랑은 과거의 것인 생각의 산물이 아니다. 생각은 사랑을 심어 기를 수 없다. 사랑은 질투와 양립하거나 질투에 사로잡힐 수 없는데, 왜냐하면 질투는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능동적인 현재이다. 그것은 <나는 사랑할 것이다>이거나 <나는 사랑했었다>가 아니다.
어떤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당신은 모르는가- 증오 없이, 질투 없이, 분노 없이, 그가 행동하고 생각하는 바에 간섭하고자 하는 바 없이, 비난 없이, 비교 없이 사랑하는 것- 당신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가? 사랑이 있는 곳에 비교가 있는가?
돕고, 주고, 봉사한다는 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모두 무엇인가? 아름다움과 빛과 사랑스러움으로 가득 찬 꽃이 <나는 주고, 돕고, 봉사한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것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땅을 덮고 있다.
단지 완전한 주의(Attention [집중 concentration이 아니다])만을 기울인다면, 당신은 관찰자도 없고 관찰되는 것도 없으며,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생각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관계, 태도, 활동들에서 안전을 바라지만, 이미 보았듯이, 실은 안전 같은 것은 없다. 어떤 관계에 있어서나 어떤 형태의 안전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 심리적으로는 영구적인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은 삶에 대해 완전히 다른 접근을 하게 한다.
요구는 이중성으로부터 나온다 - <나는 불행하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바로 그 요구가 불행이다. 누가 착해지려고 노력할 때, 바로 그 선이 그것의 반대인 악이다.
긍정된 모든 것은 그것 자체의 반대를 포함하고 있으며,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것이 극복하고자 하는 그것을 강화한다. 당신이 진실 혹은 리얼리티를 체험하고 싶어할 때, 바로 그 요구는 있는 것(what is)에 대한 당신의 불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 요구는 그것(요구)과 반대되는 것을 낳는다. 그리고 그 반대되는 것 속에는 있었던 것(what has been)이 들어 있다. 그래서 그는 이 끊임없는 요구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중성의 회랑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명상은 놀라울 만큼 기민한 마음을 요구한다. 즉 명상은 삶의 전체성-그 속에서는 모든 단편화가 중지된-에 대한 이해이다.
명상은 생각의 통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생각이 통제될 때 그것은 마음 속에 갈등을 키우기 때문이며, 그러나 당신이 생각의 구조와 근원- 그 속에 우리가 이미 있었던-을 이해할 때, 생각은 방해(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의 구조에 대한 바로 그 이해가 그것 자신의 단련이며 그것이 곧 명상이다.
명상은 모든 생각과 모든 감정을 느껴 아는 것이며, 옳다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다만 그것(생각과 느낌)을 바라보고 그것과 함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관찰 속에서, 당신은 생각과 느낌의 모든 움직임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알아차림으로부터 침묵이 나온다.
당신의 삶, 당신 자신, 당신의 왜소함, 당신의 경박함, 당신의 잔인함, 당신의 폭력, 당신의 탐욕, 당신의 야심, 당신의 일상적 괴로움과 끝없는 슬픔 - 그것이 당신이 이해해야 하는 것이며, 당신 이외에 땅과 하늘의 아무도 당신을 그것으로부터 구제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