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사상가. 인용의 달인 미셸 몽테뉴의 수상록.
몽테뉴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저는 다른 언어보다 불어를 우선 공부했을 겁니다.
서로의 사상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죠.
독일에선 니체나 쇼펜하우어 같은 학자 타입의 철학자가 많이 났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확실히 흥미롭지만, 저와는 성향이 달라요.
물론 제가 몽테뉴와 도플갱어가 아닌 이상 어찌 생각이 똑같겠어요.
그저 인간으로서 친근감이 들고 끌릴 따름입니다.
수상록을 읽으며 그가 인용의 대가라고 느낀 건,
적절한 부분에 인용구를 잘 배치했다는 느낌을 받아서입니다.
그는 단지 그 글을 오려서 자신의 책에 붙인 것이 아니고,
자신이 씹어 삼키고 소화한 것을 적었습니다.
남의 이야기만 적는 사람의 글은 힘이 없어요.
몽테뉴의 수상록은 태어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도 글이 생기발랄합니다.
그는 수상록에서 여러 주제를 다루었지만, 제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죽음에 관한 부분과 교육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저 역시 그 주제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에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던 옛사람을 만난 것이 반갑기도 한데, 한편으론 서글픕니다.
요즘도 사람들의 생각이 그 시대와 별반 다르진 않으니까요.
뭐 어쩌겠어요.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그대는 그대가 좋은 대로 하라.’ - 테렌티우스
라는 말을 내 뱉을 수밖에요.
저는 그저 제 길을 갈 따름입니다.
몽테뉴가 거짓을 바라보는 시각
‘거짓을 말하다(dire mensonge)’ 라는 것은 그릇된 일을 말하면서 그것이 진실인 줄 생각하는 것이고,
‘거짓말하다(mentir)’라는 말의 정의는 자기 양심에 반대되는 뜻을 말하는 것, 즉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을 말하는 경우다.
몽테뉴가 생각하는 죽음
우리 생애의 목표는 죽음이다. 이것이 우리가 겨누는 필연적인 대상이다. 죽음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면, 어찌 우리가 몸을 떨지 않고 한 걸음인들 앞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속인의 치료법은 그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미련해야만 그렇게도 사리를 못 보는 장님이 된단 말인가?
늙은이도 젊은이도 모두 같은 조건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 누구나 다 방금 인생에 들어왔는데 하는 식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늙었어도 마투살렘의 나이(에노크의 자식, 969까지 살았다고 함. 「창세기」5)에 다다르지 않는 동안은, 체내에 아직도 20년의 수명이 남아 있다고 생각지 않는 자가 없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죽음의 타격에서 면할 수만 있다면, 송아지 가죽이라도 쓰라면 마다할 내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정이 허락하는 한, 언제나 신발을 신고 떠날 차비를 해야 한다.
이집트 사람들은 잔치가 끝난 다음 회식객들에게 사자(死者)의 큰 초상화를 가져오게 하여 『마시고 놀아라. 죽으면 너도 이 꼴이 되리라.』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앞으로 백 년 뒤에 살아 있지 않으리라고 슬퍼하는 것은 지금부터 백 년 전에 살아있지 않았었다는 것을 슬퍼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히파니스 강에서 하루밖에 살지 않는 작은 짐승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침 여덟 시에 죽는 것은 청춘에 죽는 것이고, 저녁 다섯시에 죽는 것은 노쇠해서 죽는 것이다. 이 순간적인 일을 행 혹은 불행이라 생각하는 것을 보고, 우리들 중에 그 누가 비웃지 않을 것인가? 우리의 일생을 길다 짧다 하는 것은, 그것을 영원과 비교해 보거나 또는 산이나, 별이나, 나무들이나, 기타 딴 동물의 수명과 비교해 본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몽테뉴가 말하는 교육
어린애들이 가야 할 방향을 잘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뿌리를 박을 수 없는 일에 그들을 훈련시키려고 헛된 수고를 하며 많은 세월을 허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곤란에 처해서 내 견해로는 그들을 항상 가장 좋고 가장 유익한 일로 지도하며, 우리가 어릴 때의 아이들 동작을 보고 경솔하게 짐작하고 예측하는 바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가정교사는 마치 깔때기에 물을 부어넣듯 끊임없이 우리 귀에 잔소리를 퍼붓고 우리는 그가 말하는 대로 되풀이 하기만 할 뿐입니다.
제자의 걸음걸이를 판단하고 그의 힘에 맞추어 가기 위해 자기의 자세를 어느정도로 낮추어야 하나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앞에서 그를 걸어보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선생님은 제자에게 모든 것을 체로 걸러내어 자기 머리에는 단순한 권위와 신용만으로 아무 것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이건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스 학파의 원칙이건 그것이 자기 원칙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천차만별의 판단을 그의 눈앞에 내보여야 합니다. 그는 할 수 있으면 택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의문 속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확고부동한 것은 백치(白痴)뿐입니다.
진리와 이치는 누구에게나 공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에 말한 자의 소유가 아니며, 뒤에 말하는 자의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고 진리가 아니며 플라톤이 말했다고 해서 진리라는 까닭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도 나도 똑같이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보고 있으니까요. 꿀벌은 이리저리 꽃을 찾아 다니며 그 뒤에 꿀을 만듭니다. 그 꿀은 전부 그들의 것입니다. 이미 그것은 사향초꿀도 박하꿀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그도 남으로부터 빌린 것을, 형체를 바꾸어 섞이고 완전히 자기 자신의 작품을, 즉 자기 자신의 판단을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그의 교육, 그의 공부, 학습도 오직 이 판단을 만들어 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연약하고 겁 많은 어린 마음들을 손에는 채찍을 들고 시뻘건 무서운 얼굴로 지도하니, 이것이 아이들에게 공부할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방법이겠습니까? 정당치 못하고 해로운 방법입니다. 아이들의 이익이 있는 곳에는 그 즐거움도 있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자제를 삼단논법과 같은 귀찮은 궤변으로 공박하여 『소금에 절인 햄을 먹으면 물이 마시고 싶다. 물을 마시면 갈증이 풀린다. 따라서 햄은 갈증을 풀어 준다.』라고 말해 보면 어찌 해야 좋겠습니까? 그 따위는 코웃음 쳐주면 됩니다. 대답하기 보다는 정말 코웃음 치는 편이 현명합니다.
공부하려는 의욕과 흥미를 돋구어 주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책을 억지로 짊어진 당나귀가 태어날 뿐입니다. 그들은 채찍에 맞아가면서 주머니 가득히 학문을 쑤셔 넣습니다. 그러나 학문을 잘 쓰려면 그것을 담아 두기만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수상록 속 인용구
그 운율을 빼버리고, 앞에 있는 글귀를 뒤에 놓고, 마지막 글귀를 처음에 바꾸어 놓아라. 시는 흩어져도 그대는 역시 그 곳에서 시인의 모습을 보리라(호라티우스 「풍랄시」 1의 10)
그는 마치,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산을 넘고 골짜기를 건너, 토끼를 쫓는 사냥꾼 같다. 그는 이미 잡은 것은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저 달아나는 것만들 쫓아간다(아리오스토 「노한 오르란도」 10의 7)
사랑이란 아름다운 사람의 우정을 얻으려는 노력이다. (키케로)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그대는 그대가 좋은 대로 하라.(테렌티우스 「헤아우톤티모로우메노스」 1의 1의 28)
이제 늙은 농부는 머리를 흔들면서 한숨을 쉬고 지난날을 지금과 비교하여 가끔 부친의 행운을 찬양하며, 옛날 사람들이 얼마나 신앙심이 깊었던 가를 되풀이한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2의 11의 65)
본인의 뜻에 반하여 그 목숨을 살리는 것은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세네카 「서간」 77)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하는데, 그대는 대리석을 깎고 무덤 대신에 집을 짓는다(호라티우스 「카르미나」 2의 18의 17)
관능적 욕구에서 해방된 것을 연령에 감사한다. (소포클레스 「연령론」14)
좋은 수확을 하려면 손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부대로 뿌려서는 안 된다. (그로토우스 리프시우스)
누구에게나 자기의 똥은 냄새가 좋다(에라스무스 「격언집」3의 4의 2)